• 2025. 12. 29.

    by. 시질로그래피 연구자

    인장은 역사 문서에서 신뢰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다. 인장의 유무, 형태, 위치, 배열 방식 등은 시질로그래피의 주요 분석 대상이며, 문서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과 체계를 따라 생성되었는지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실제로 아카이브에 남겨진 문서들 중 상당수는 보관 상태의 악화, 사용자에 의한 훼손,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인장이 불완전하거나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다. 이처럼 훼손된 인장을 마주할 때 시질로그래피는 그 분석 과정에서 일정한 제약과 해석상의 모호성을 피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파손된 인장을 해석할 때 시질로그래피가 직면하게 되는 6가지 구조적 한계를 중심으로, 그 복원 가능성과 판단 기준의 어려움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시질로그래피에서 인장 텍스트의 손실로 인한 정체성 추정의 불확실성

    인장의 가장 핵심적인 정보는 인면에 새겨진 텍스트다. 대부분의 인장은 관직명, 성명, 조직명, 혹은 특정 권위의 상징문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 문서의 발행 주체나 승인 권한을 식별하는 핵심 근거가 된다. 그러나 파손된 인장은 종종 텍스트 일부가 닳거나 긁혀 있거나, 먹물 번짐으로 인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다. 이 경우 연구자는 일부 남은 획이나 음각의 곡선만으로 해당 인장의 정체성을 유추해야 한다. 이러한 유추는 선행 문서나 동시대 관행에 대한 높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만, 그 자체가 추론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분석의 객관성과 반복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다.

    게다가 동일 시대에 유사한 명칭이나 서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단편적인 문자 정보만으로는 인장의 주체를 특정하기 어렵다. 이는 시질로그래피 해석이 자칫 '가설 위에 가설을 더한 불확실한 구조'로 귀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장의 형태가 사라질 때 발생하는 기호 해석의 단절

    인장은 단지 텍스트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형태 자체가 중요한 해석 단서다. 원형, 방형, 타원형 등 외곽 구조는 인장 사용자의 신분, 기관 성격, 문서 유형에 따라 일정한 규칙성을 보인다. 그러나 파손된 인장에서는 이러한 외곽선이 심하게 마모되거나, 일부만 잔존하는 경우가 많다. 형태를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인장이 개인의 것인지 관청의 것인지, 혹은 인증 인장인지 보증 인장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더구나 인장의 구조적 특징은 문화권마다 매우 상이하며, 동일한 시대 내에서도 정치적 상황이나 제도적 변화에 따라 급격히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외곽 형태가 일부만 남은 인장을 두고 전체적인 형식을 단정하는 것은 시질로그래피의 해석 범위를 현실보다 단순화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잉크의 색상과 농도에 의한 시간성 판단의 제한

    시질로그래피는 인장의 ‘시간성’을 파악하기 위해 잉크의 색상, 농도, 번짐의 정도 등을 중요한 해석 요소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진하고 선명한 붉은색 인장은 해당 문서의 발행 시점에 사용된 원인장일 가능성이 높으며, 색이 바래거나 농도가 엷은 인장은 사후적인 인증 혹은 추후에 추가된 도장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색조와 번짐의 차이는 인장의 사용 순서뿐 아니라 문서 내 권력 흐름이나 행정 절차의 시간적 단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아카이브에서 수집된 문서들은 일정한 조건에서 보관되지 않았기 때문에, 잉크의 색상이 환경에 따라 변질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 특히, 장기간 보관된 문서에서는 종이의 산화, 곰팡이의 침투, 그리고 반복된 접힘과 압력 변화로 인해 잉크의 원색이 균일하게 바래거나 예측 불가능한 색상으로 변색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동일 문서 내에서 원래 다른 시점에 찍힌 인장들이 동일한 색조로 보이는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또한 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재질이나 코팅 여부, 표면의 흡수력 차이에 따라서도 잉크가 번지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색상의 잉크라도 비단지(非丹紙) 계열 문서에서는 잉크가 퍼지며 색이 옅어지지만, 밀도가 높은 한지류에서는 더 진하게 남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잉크의 농도만으로 인장 간의 시간적 선후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더불어, 일부 문서는 제작 과정에서 이미 복수의 인장이 동시에 찍힌 상태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 색상이나 농도가 다르게 보인다고 해도, 그 차이가 사용 시점이 아닌 인장 도장 방식이나 도료 혼합 비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결국 시질로그래피가 잉크의 색과 농도에 의존하여 시간성을 해석할 때에는, 그 판단이 ‘단일 변수 해석’이 아닌 ‘문서 맥락과 물리적 조건을 함께 고려한 복합 분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파손된 인장을 시질로그래피로 분석할 때의 한계선

    복원된 인장 이미지를 통한 디지털 분석의 기술적 한계

    최근에는 파손된 인장을 복구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이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고해상도 스캔을 통해 인장 이미지를 확보한 후, 이미지 처리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흐릿한 경계선을 명확하게 복원하거나, 일부 소실된 획을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보정하는 방식이 그 예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장의 형태나 텍스트를 머신러닝 기반 알고리즘에 학습시키면, 비슷한 패턴을 자동 인식해 유사 인장을 자동 분류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특정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며, 지나치게 훼손된 인장이나 비정형 도장 구조에는 적용의 한계가 명확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수공(手工) 인장은 도장할 때의 손 압력, 방향, 종이와의 접촉 각도에 따라 형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인장이라 하더라도 매번 다른 이미지가 생성된다. 이 경우 정형화된 기준에 맞춘 디지털 복원은 원래 인장의 특성을 왜곡하거나, 특정 요소를 과장되게 재현할 수 있다.

    게다가 문서에 인장이 삽입된 각도나 위치가 기울어져 있는 경우, 이미지 복원 과정에서 ‘기하학적 왜곡 보정’이 자동으로 적용되면서 실제 인장의 비율이나 구성 요소가 달라지게 된다. 이는 원본과 복원본 간의 미세한 차이가 누적될 경우, 인장의 정체성 판단이나 동일 인장 여부를 구분하는 데 오류를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이미지 인식 기술은 현재까지 주로 인쇄 문자나 현대 문서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 문서에서 나타나는 비정형 문자, 자음과 모음이 분리된 형태, 혹은 손글씨풍 각인에 대해 일관된 인식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복원 과정에서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획이 생성되거나, 기호 간 구분이 잘못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고문서에 사용된 ‘전서체(篆書體)’나 ‘예서체(隸書體)’는 이미지 알고리즘이 아직 학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자동 인식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도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디지털 복원은 시질로그래피의 새로운 보조 도구로서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인 판단 기준이 되기에는 아직 기술적 성숙도가 충분하지 않다. 연구자는 복원된 이미지에 의존하기보다, 원본 문서의 물리적 흔적과 육안 관찰을 병행하는 전통적 접근을 함께 유지해야 하며, 디지털 기술을 해석의 ‘도우미’로 활용하는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기술은 해석을 보완할 수 있으나, 궁극적인 문맥 해석의 책임은 여전히 연구자에게 있다는 점이 시질로그래피의 핵심 윤리로 남는다.

     

    파손된 인장을 둘러싼 문서 맥락의 상실 문제

    시질로그래피는 인장을 개별적 사물로 보지 않고, 항상 문서 전체 구조 안에서 그 기능과 역할을 해석한다. 그러나 파손된 인장이 있는 문서는 흔히 전체 문서 상태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용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거나, 문서의 첫 장 혹은 마지막 장이 결실된 상태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장의 기능을 판단할 수 있는 서술적 맥락, 즉 본문 내의 명령어, 발급 사유, 인증 절차 등이 함께 소실되는 경우가 잦다. 그 결과 인장이 본래 어떤 기능을 담당했는지를 해석하기가 어려워지며, 인장의 정치적 의미나 사회적 효력을 오독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다층적 해석의 과잉 추정 문제

    파손된 인장을 마주한 연구자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비교 자료와 유사 사례를 통해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시질로그래피에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적 접근이지만, 지나치게 추론 중심으로 흐를 경우 해석의 과잉 일반화가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유사한 시기의 문서에서 특정 형태의 인장이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파손된 인장이 동일한 체계에 속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해석이 문서의 실제 특수성을 무시하고, 문서 생산 구조를 하나의 보편 모델에 끼워 맞추는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파손된 인장을 해석할 때에는 ‘가능성’의 범주와 ‘사실’의 범주를 명확히 구분하고, 독립된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태도가 시질로그래피 분석의 신뢰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파손된 인장의 해석, 시질로그래피의 숙제이자 가능성

    파손된 인장은 시질로그래피에 있어 단순한 물리적 결함이 아니라, 기록 해석 과정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판단을 요구하는 지점이다. 텍스트, 형태, 잉크 상태, 문맥 등 다양한 요소가 결여된 상태에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사료가 스스로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는 인문학적 응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파손된 인장 해석에는 객관성의 저하, 기술적 오류, 문맥의 왜곡 가능성 등 다양한 한계가 따라붙는다. 시질로그래피는 이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오히려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연구 방법론을 세워나가야 한다.

    즉, 해석의 명확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증거로부터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다층적 해석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파손된 인장 분석의 올바른 방향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시질로그래피는 역사 해석의 엄밀함과 해석자의 책임성을 함께 요구받는 영역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