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12. 27.

    by. 시질로그래피 연구자

    시질로그래피(Sigilography)는 반복되는 시각 기호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고 재구성하는지를 분석하는 해석적 기술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종종 하나의 완성된 상징 결과를 '해석'하는 작업으로 축소되어 이해되곤 한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시질로그래피는 기호가 무엇을 뜻했는지, 어떤 권력을 대표했는지와 같은 결정된 결과를 읽는 방식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시질로그래피가 지향하는 핵심은 특정 기호의 고정된 의미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기호가 반복, 변형, 재맥락화되는 과정 그 자체를 추적하며, 그 속에서 사회적 의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려는 분석틀에 가깝다. 시질로그래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호가 무엇이었는가'보다 '기호가 어떻게 작동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결과 중심 해석을 넘어, 과정 중심 시각에서 시질로그래피를 이해하는 접근 방식을 다섯 가지 주요 측면을 통해 정리해 본다.

     

    시질로그래피는 단일 의미의 규명이 아닌 의미 생성의 경로를 추적한다

    시질로그래피는 특정 인장이나 문양, 로고 같은 기호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물론 의미 해석은 이론의 일부지만, 이 분석 방식의 핵심은 기호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등장했으며, 어떻게 반복되며 다른 맥락으로 전이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문양이 왕권의 상징으로 쓰였다가, 훗날 시민운동의 로고로 전용되는 사례는 시질로그래피적 분석의 주요 대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가’가 아니라, ‘그 문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거나 재정의되었는가’이다. 이런 맥락 추적은 결과에 대한 해석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실제로는 기호가 작동하는 방식에 더 가깝다.

     

    의미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 사회적 힘이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시질로그래피는 기호가 사회 속에서 반복될 때마다 고정된 뜻을 유지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 자체가 기호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이 과정이 사회적 기억이나 권위, 감정적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특정 인장이 수십 년 동안 여러 문서에 반복 사용되면서, 그것이 단지 행정 절차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신뢰나 권위의 감정적 기반으로 내면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반복과 계열화 속에서 기호는 단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감정적 정서와 권력 구조를 강화하는 작동체가 된다.

    결과를 해석하는 시각으로는 이런 내면화 과정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질로그래피는 반복과 변형의 과정 자체를 하나의 문화적 메커니즘으로 다룬다.

     

    재맥락화의 흐름 속에서 기호의 사회적 위치를 분석한다

    기호는 시대, 사회, 매체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맥락에서 재맥락화된다. 동일한 기호라도 문맥이 바뀌면 의미도 전환된다. 시질로그래피는 이러한 재맥락화의 계기와 방향성에 주목한다.

    예컨대, 종교적 문양이 상업 브랜드 로고로 차용되거나, 반대로 기업 로고가 예술 운동에서 저항의 기호로 전환되는 사례는 수없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기호의 재사용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과 정치적 구조 속에서 기호의 위치와 기능이 재조정되는 과정이다.

    시질로그래피는 기호의 현재적 의미를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 기호가 어떤 변화의 연속성 속에서 새롭게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의미 생성의 과정을 분석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 중심으로 이해하는 시질로그래피

    해석의 단위로서 ‘사례’가 아니라 ‘계열’에 주목해야 한다

    기호를 하나의 사례로 고립시켜 해석하는 방식은 그 기호가 속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단편화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특정 문양이나 인장을 독립된 개체로 분석하면, 그 기호가 어떤 계열적 관계 안에서 반복·변형되어 왔는지, 또는 이전 기호들과 어떤 계보적 연속성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파악이 어렵다. 시질로그래피는 이러한 해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단일 사례보다는 그 기호가 속한 계열 전체를 분석 단위로 설정한다. ‘하나의 이미지’보다 ‘그 이미지가 만들어낸 흐름’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접근 방식은 기호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해 가는 시간적 전개, 형식적 반복, 문화적 전유 과정을 함께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국가 기관에서 사용되던 인장이 시민단체의 로고로 차용되고, 이후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패러디되는 과정을 살펴볼 때, 각각의 사례만 보면 의미 전환의 메커니즘이 단절되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계열로 놓고 분석하면, 그 기호가 어떤 형식적 규칙과 문화적 감수성을 타고 변화했는지를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는 동일한 기호가 다양한 밈(meme), SNS 콘텐츠, 짤방 이미지 등으로 확장되며, 계열적 흐름이 더욱 빠르고 복잡하게 구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질로그래피는 ‘사례 연구’ 중심 분석으로는 놓치기 쉬운 기호 간의 상호참조, 유사 구조의 반복, 비선형적 변형 과정 등을 포착할 수 있게 한다. 디지털 로고의 변형 계보, 밈의 시각 패턴 변이, 소셜 캠페인에서의 도상 반복 등은 모두 계열 중심 해석을 통해 그 의미 생성 구조가 분석 가능한 대상이 된다.

    결국 시질로그래피는 기호를 정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망 속에서 이동하고 결합되는 흐름으로 본다. 이 흐름을 단일 사례의 누적이 아닌, 계열의 상호작용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기호의 작동 방식에 대한 본질적 통찰이 가능해진다.

     

    기록 해석 방식의 전환을 이끄는 실천적 분석 틀로 작동한다

    과정 중심의 시질로그래피는 단지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기록을 읽고 구성하는 방식에 구조적 변화를 유도하는 실천적 분석 도구로 기능한다. 전통적인 기록 해석은 주로 텍스트 기반으로 진행되며, 서술된 사실의 진위 여부나 내러티브의 논리적 흐름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시질로그래피는 기록물 안에 내재된 시각 기호들—인장, 문양, 배치 구조, 색상 코드—등을 새로운 분석의 중심으로 위치시킨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히 시각적 요소를 보조 정보로 취급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기록물의 구성 원리 자체를 기호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내용의 문서라 하더라도 인장의 위치, 크기, 형태가 달라지는 경우 그 사회적 의미와 권위 구조는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시질로그래피는 이처럼 표면 아래 숨겨진 형식의 정치성기호의 구성 논리를 함께 분석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디지털 아카이브 환경에서는 이러한 시각 기호의 실시간 수집, 분류, 패턴 인식이 가능해지면서, 시질로그래피는 데이터 기반 분석과 결합하여 더욱 정교한 해석 도구로 작동한다. 이미지 인식 기술, 시계열 분석 알고리즘, 메타데이터 기반 계열 추적 등은 과거 수작업 분석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기호의 변형 흐름과 의미 구성 과정을 가시화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기술적 조건은 시질로그래피가 이론을 넘어 현실적인 연구 방법론으로 확장되는 배경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분석 방식은 단지 학문적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록 생산과 보존의 윤리적·정치적 기준을 재구성하는 계기로도 기능할 수 있다. 어떤 기호가 어떤 조건에서 반복되었는가, 그것이 어떤 계열에 속하며 어떤 권위 구조에 의해 정당화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시질로그래피는, 기록을 단순한 증거물이 아니라 문화적 권력 장치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기록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보’에서 ‘구성된 의미의 결과물’로 이동시키는 중요한 변화다.

    이처럼 시질로그래피는 과정을 분석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기록 해석 자체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는 실천적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는 기록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어떻게 기록을 형성했는지를 역방향으로 읽는 작업이며, 텍스트를 넘는 읽기의 지평을 넓히는 이론적·방법론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과정 중심적 시질로그래피가 분석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이유

    기호는 본래 고정된 의미를 갖기보다, 반복과 재맥락화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의미를 갱신하며 사회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시질로그래피는 단일한 결과를 밝히는 해석보다, 의미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흐름 자체를 분석하려는 방식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결과 중심 해석은 기호의 역사성과 사회적 맥락을 고립시킬 위험이 있으나, 과정 중심의 시질로그래피는 기호의 작동성, 계열성, 위치 이동성 등을 포착함으로써 더 깊이 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호를 움직이는 힘을 이해하려면, 기호가 도달한 ‘지점’이 아니라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와 구조를 먼저 읽어야 한다.